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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북동부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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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0년 전 출간한 서애 유성룡의 『징비록(懲毖錄)』은 지금도 유효하다. 불과 60여 년 전의 전쟁을 우리는 많이 잊고 있기 때문이다.>
2013년 11월 8일자 조선일보가 『백선엽의 6ㆍ25 징비록』 연재를 시작하면서 적은 기사 내용이다. 그 이듬해 2014년 11월 25일자 제87회 기사는 ‘낙동강 전선 거대한 공습, 융단폭격’이란 소제목을 달고 “미 폭격기들이 1950년 8월 구미 일대에 융단폭격을 하는” 사진 아래에 다음과 같이 백선엽 장군의 기억을 옮겨놓고 있다.
“하늘에서 그저 ‘웅~웅~’거리는 소리만 들렸다. 미 8군이 폭격에 대비해 참호 속에 들어가 나오지 말라고 했던 시간이었다. 하늘엔 굉음만 가득했다. 미군 폭격기들이 대구 북방과 왜관 쪽을 향해 새카맣게 몰려가고 있었다. 예정 시간이 되자 폭발음이 들리기 시작했다.
맹렬했다. 땅이 흔들리는 느낌이었다. 곧이어 폭발음과 함께 실제로 땅이 울렁거렸다. 융단폭격이었다. 지정한 지역을 융단 깔듯이 폭탄으로 덮어버리는 작전이다. 일본 오키나와와 가네다 기지에서 발진한 미군 B-29 전략 폭격기 98대가 날아와 전선의 지축을 흔들었다.”
B-29의 성능은 실제로 매우 뛰어났다.?실로 이 기종은 당시 전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엔진을 사용했을 뿐만 아니라, 가장 긴 날개와 가장 큰 프로펠러를 장착했다. 수직꼬리날개가 3층짜리 빌딩만큼 높았다. 아무튼 오죽하면 융단폭격이라고까지 서술하고 있을까. 우리는 한국동란 기록영화에서 평양 북쪽 숙천지역 푹격 화면을 볼 수 있는데, 과연 ‘융단’이란 표현이 과장이 아님을 알게 해준다.
다시 다부동 전투에서 폭격기들은 “이날 오전 11시 58분에 폭격을 시작해 12시 24분까지 26분 동안 400~900㎏에 달하는 폭탄 960t을 쏟아 부었다”고 전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래 최대 규모의 폭격이었고, 다부동에서 벌어지던 당시의 전쟁 양상이 그만큼 심각했음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다시 백선엽 예비역 대장의 증언이다.
“그날의 폭격은 왜관 북방인 구미 일대의 가로 5.6㎞, 세로 12㎞ 지역에 집중됐다. 우리로서는 적이 버티고 있는 곳이라 폭격 효과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 길이 없었다. 하늘이 울리고 땅이 흔들렸다는 점에서 폭격의 규모가 상상 이상으로 대단했으리라는 짐작만 했을 뿐이다.”
6월 25일 북한 공산군의 남침이 시작된 지 두 달이 채 안 된 8월의 다부동 전투는 영천전투 직전에 있었고, 대구를 향한 길목에서 지켜낸 전투라는 점에서 이 전쟁 역사에서 큰 비중을 차지한다. 한반도의 전쟁은 대개가 압록강 신의주에서 평양, 이어 서울~대전~대구~부산의 축을 따라 움직이게 마련이고, ‘한반도 전쟁의 축선’인 이곳은 한반도 교통의 축선이기도 하며, 인구가 가장 밀집해 있고, 그에 따르는 물자가 가장 활발하게 집산하는 곳이기 때문에 “이 축선을 점령하면 한반도에서 벌어진 전쟁에서 승리를 선언할 수 있는 것”이라고 『백선엽의 6ㆍ25 징비록』(제84회, 2014.11.13.)은 적고 있다.
과거의 전쟁에서도 그랬고, 65년 전의 전쟁에서도 마찬가지였으니, “김일성의 군대는 서울을 점령한 뒤 대전, 이어 대구를 점령해 종국에는 부산을 수중에 넣고 한반도 전쟁에서의 승리를 이루고자 혈안”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지역 방어를 담당한 국군 제1사단은 보충 받은 학도병 500여 명을 포함, 7,600여 명의 병력과 172문의 화포 등 열세한 전투력을 극복하면서 공산군의 이른바 8월 총공세를 저지해 대구를 고수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북한군은 8월 공세에서 다부동과 대구에 대한 공격이 실패하자 제15사단을 의성을 거쳐 영천으로 이동시켰다. 이는 영천을 점령한 후 대구 또는 경주로 진격한다는 의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