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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북동부신문 |
마음이 어지럽고 산란할 때면 핸들을 잡고 내고향 영천시 청통 신학마을을 휘익 둘러오곤 한다. 내가 태어나고 자라고 살아온 아득한 마음속 깊은 곳의 자궁, 내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본(本)을 향한 궁극의 자리, 바로 그 곳이다. 따스함과 정겨움이 흠뻑 서린 내 모든 에너지의 원천을 조용히 걸어보며 추억의 아늑한 풍경에 젖어 본다.
아련한 추억의 뜨락~ 길 건너 가게를 했던 옥이집, 옆집 이발소 무자집, 뒷 텃밭이 넓었던 옆집 수만이집, 담배 가게 한호집, 골목 안 무식이집, 골목아래 과수원 정숙이집, 그 아래 동장네였던 장호집....
알싸한 아침 공기가 열릴 무렵에 무거운 눈을 뜨고 대문 밖을 나서면 부지런한 동네어른들은 어느새 보삽 들고 장화바람으로 논에 물대러 다녀오시고 아침밥 드시러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낮이면 나팔꽃이 올라가는 화단 옆 여름텃밭 채소에 물주는 일이나, 들에서 일하고 있는 일꾼아저씨들의 중참을 배달하는 임무는 항상 막내인 내 몫이었다. 삶은 감자를 배달하거나, 때로는 국수, 때로는 미숫가루물을, 아저씨들은 막걸리 중참을 참 좋아하셨다.
신동댁 막걸리 한 주전자 사들고 동네 아래 솔숲길 지나 무서운 상여집을 거쳐서 밭까지 땡볕을 걸으며 가져다 드리려면 따가운 햇살은 여간 성가시지 않았고, 중참 가져가는 길은 언제나 잰걸음을 걷게 했다.
자연스레 막걸리주전자 주둥이가 입으로 가고, 그 때 꿀꺽이는 맛은 최고로 시원한 생명수가 되었다. 저녁 무렵의 알케한 굴뚝연기가 피어오를 쯤이면 엄마의 저녁밥 먹으러 오라는 부름소리가 아련히 들려오고, 우리는 흙먼지 폭닥이는 오징어가생이나 땅따먹기, 빤돌을 서둘러 마무리했다.
밤이 되면 집 마당에 돗자리 깔아놓고 마실 어른들이 흑백 TV속 [여로]의 장욱제, 태현실, 박주아의 연기에 푹 빠져 하루노동의 피로를 풀 때도 있었고, 김일의 헤딩과 천규덕이 나오는 레슬링 경기 때가 되면 온 동네 함성으로 때늦은 야밤에 힘찬 에너지가 솟아올랐다. 주말마다 방송하는 [주말의 명화]와 [명화극장]은 유일한 문화생활을 만끽할 수 있는 가장 아끼는 프로그램이었다.
어떤 여름밤에는 따가운 땡볕 속 힘든 노동을 마친 후 선들선들 밤바람 쇠며 동네 큰길가 길섶에 등겨모깃불이 지펴지고, 불구덩이를 휘적이며 감자나 사과를 구워 재미로 먹기도 하고, 몇몇 친구들은 달빛을 조명삼아 만당과 안골목 뒷골목을 누비며 숨바꼭질도 재미났다.
언니들은 하나 둘씩 저마다 쌀 한줌씩 가지고 모여 하얀 쌀밥을 해먹는 ‘밥디리’를 하기도 했다. 양식이 귀할 때라 온갖 곡식을 섞어 혼식을 해야만 일 년 양식이 돌아가지만, 이 때 만큼은 은밀하게 언니들의 하얀 쌀밥 밥상을 구경할 수 있는 때였다. 찬으로는 동네에서 맛있기로 소문난 집 장독이 표적이 되어 살금살금 몰래몰래 김치포기를 가져왔다.
빨간 김치를 손으로 쭉쭉 찢어서 하얀 쌀밥 위에 엊어 먹는 그 아삭상큼한 맛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국화빵 틀을 빌려와 밀가루 반죽으로 노릿한 빵을 구워먹는 재미를 다시 누려볼 수 있을까? 요즘도 가끔 그 시절이 생각나 포장마차 붕어빵을 사먹으며 나만의 추억에 젖어보곤 한다.
이맘때 작은오빠들은 밀밭으로 돌아다니며 ‘밀서리’를 했다. 토실한 밀대를 골라 꺾어서 불을 지피고 밀대자루를 들고 돌려가며 구운 후, 손바닥으로 야멸차게 밀면 야들야들 밀알만 남게 된다. 입에 톡 털어넣고 조근조근 씹으면 쫀득쫀득 맛이 살아나고, 아까워서 조금씩 두고 씹으며 맛을 즐겼다.
밤이면 화투치기를 하고나서 이긴 편은 솥에 물을 끓이며 준비하고 있고, 진 편은 닭서리를 하러 갔다. 몰래 닭장으로 숨어들어 닭모가지를 재빠르게 틀어쥐어야 닭울음소리 없이 은밀하게 낚아채 올수 있었다. 털을 뽑고 내장을 꺼내고 펄펄 끓는 물에 푹 고아서 한상 가득 잔치를 했다.
양념 하나 없이 오로지 소금 간으로 찍어먹어도 한 마리 닭은 순식간에 해치웠고, 귀한 닭꽁지 지방덩이는 닭서리에 가장 수훈이었던 오빠친구 차지였다.
생각해 보니 때를 써가며 끝까지 졸졸 따라다니려던 여동생이 오빠는 얼마나 성가시고 얄미웠을까도 생각되고, 재산을 불려주는 귀한 닭이었음에도 이튿날 지서에 고발하는 동네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여름밤이 익어 가면 평상에 누워 엄마무릎 베개 삼아 밤하늘 별자리 세어가며 스르륵 잠이 들고, 아침이면 모기장 쳐진 방 안에서 잠을 깼다.
큰오빠는 하얗게 눈이 온 날, 장총을 들고 새를 잡으러 들로 산으로 나갔다. 고무털신 신고 따라 나서면 제발 집에 있으라고 떼어 놓으려 했지만, 고집 센 막내를 할 수 없이 귀마개와 장갑으로 무장시켜 달고 다녔다. 다니면서 개암나무 남은 열매가지 꺾어서 까치열매를 먹이기도 하고, 참새며 꿩이며 잡은 수확물을 줄에 꿰어 따라 다니게 허락했다. 발이 꽁꽁 얼어 감각이 없어져도 나는 절대 내색하지 않고 씩씩하게 신나게 따라 다니곤 했었다.
명절에는 경운기 타고 애련동 선산으로 성묘하러 가면, 집성촌 집집마다 친척집이라 따뜻한 환대와 푸짐한 음식으로 정을 나누고, 산소 기슭의 나이든 밤나무는 주저리주저리 밤송이를 선물을 안겨주어 따갑게 찔려가면서도 윗옷 앞자락이 늘어나도록 불룩하게 알밤을 안고 돌아왔다. 이런저런 가족과 골목친구들의 추억이 가득한 고향마을 경험은 담력을 키우고 용기를 심으며 겁을 물리치는 성장기의 귀한 경험들로, 살아가면서 부딪치는 숱한 세파의 난관을 극복할 힘을 길러주는 훈련장이었던 셈이다.
청소년이 되면서 학업을 위해 도시로 떠나게 되었고, 현실 적응에 바빠서, 눈코 뜰 새 정신없이 앞만 보며 달리며 살아 온 시간들로 고향을 등지게 되었고, 내게 준 하늘같은 유년의 선물은 까마득히 잠재우고 살았다. 대학을 졸업하고 첫 발령지가 경주에 있는 여고였는데, 고향 가까이 살고 싶은 마음에 다시 경산의 현재 학교로 이동하게 되었다. 무의식 중 내겐 원초적인 지향이 고향집이었나 보다.
지금은 청석 비탈 평편한 곳에 살림집 차리고서 아빠 엄마하며 소꿉질하던 아늑한 우리들의 아지트는 새로 난 도로로 휑해져 버렸고, 절벽에 기어올라 진달래 꺾어 말없이 건네주던 떠꺼머리 소년의 흔적도 이제는 없다. 다만 다정함과 그리움과 안타까움이 함께 내 가슴 깊은 곳에 태고적 유물 같은 보석으로 남아있을 뿐이다.
사랑하는 부모님도 지금은 모두 소천하시고, 그리움으로만 가득한 내 고향.
부모님이 계시지 않는 고향은 햇살 빛깔과 바람의 훈기부터 다르다. 품어주고 다독여주기만 했던 고향이 이제는 마음 깊숙한 곳의 아픔과 회한으로 눈물 나게 한다. 보고싶고 보고싶은 어머니를 생각하면...
넓은 과수원 농사일로 일꾼들과 하루 종일 지치고 고단한 몸으로도 밤늦게 밑반찬 챙겨서 딸아이 자취집에 가져다주시고 아침 첫차로 집에 내려가시던 어머니, 우리 막내 고기보(고기 좋아하는 아이)라서 그 바쁜 중에도 한 번씩 오셔서 고기식당으로 손잡고 고기 먹이러 가주셨던 우리 아버지. 할아버지 생신날에 어린 손녀 편지글을 재미나게 읽으시고 벽에 붙여놓으시며 기뻐하시던 그 모습, 한평생 그렇게 바삐 사시더니, 병환으로 막상 누우시니 마른 풀잎처럼 가벼워지셨던 우리 아버지. 새록새록 그리운 추억으로 때로는 미소로, 때로는 눈물로, 가슴 아리게 다가오는 부모님의 사랑. 그렇게 객지에 나간 자식을 위하여 희생하고 기도하신 결정체가 우리 6남매의 성장이다.
신라시대 최치원(崔致遠)은 당나라에 가서 쓴 <추야우중 秋夜雨中>이라는 시로 고향을 그리워했다.
“가을바람에 홀로 시를 읊으니 / 세상에 내 마음 아는 이 없네 / 창밖에는 밤이 깊도록 비가 내리고 / 등 앞에 앉은 이내 마음은 만리 고향으로 달리네.”라고 타향에서 울적하고, 외롭고 힘든 마음을 향수로 달랬다.
고려 말 정몽주(鄭夢周)가 일본에 사신으로 갔을 때<봉사일본 奉使日本>에서 고국을 그리는 정은 같다. “섬나라에 봄이 돌아와도 / 나는 하늘 끝에 떠도는 나그네 / 풀은 천리만리 짙푸르고 / 저 달은 두 나라를 비추누나 / 일본을 달래며 황금은 스러지고 / 돌아갈 이내 몸에는 흰 머리만 나누나 / 아, 사나이 품은 큰 뜻은 / 사방에 이름을 떨치는 이것뿐일까.” 고독하고 힘든 생활에서 공명보다 더 귀한 고국과 고향 생각을 절절이 읊었다.
요즘처럼 이웃도 모르는 각박한 인심과 급변하는 사회에서 치열하게 경쟁하며 영악한 이해관계가 실타래처럼 얼키설키 살아가면서, 포근한 고향의 따뜻함과 아늑함이 더 더욱 그리워진다. 오늘같이 비가 촉촉이 내리는 날, 갈라진 샛강이 다시 합쳐지듯이 내 모든 정서의 언어가 되고 노래가 되고 시가 되는 나의 본적 고향 길을 밟으며 따뜻한 마음의 위로를 받고 싶다. 아직도 찾아가 볼 수 있는 고향이 있음에 감사하는 마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