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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일반

<특별 기고> 사법부와 검찰, ‘유서 대필’ 사건 사과해야

경북동부신문 기자 입력 2015.07.07 10:44 수정 2015.07.07 10:44

황 진 선 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동료의 자살을 방조하면서 유서까지 대신 써 준다는 것은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일이다. 한데 24년 전 검찰은 그런 일이 일어났다고 판단했다. ‘유서 대필자’를 자살 방조죄로 법정에 세웠고 1, 2, 3심은 모두 징역 3년을 선고했다.

그 유서 대필자인 강기훈(51)씨가 지난달 14일 대법원의 재심 상고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2008년 재심을 청구한 지 7년 만이다. 1991년 5월 강씨가 검찰의 수사를 받고 재판에 회부되던 때를 기억한다. 유서를 대필했다는 얘기를 전해 듣는 순간, 정말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필자는 법원과 검찰을 맡고 있던 ‘출입 기자’였다. 다른 출입 기자들도 거의 같은 생각이었다.

검찰의 수사 책임자들은 김기설(당시 26세)씨가 남긴 유서의 필체가 김씨가 아닌 강기훈씨 것이라는 국립과학수사연구소(현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감정 결과를 들이댔다. 당연히 당시 노태우 정권과 검찰의 눈치를 보느라 감정 결과를 왜곡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그래서 묻고 또 물었다. 훗날 진실이 밝혀지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감정을 반박하기는 어려웠다. 필자는 부끄럽지만 유서 대필이 사실인지 적극적으로 확인하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검찰과 법원의 발표와 판결을 그대로 인용했다. 30년 넘게 기자 생활을 해오면서 기자답지 못한 여러 일을 저질렀지만 그 중에서도 유서 대필 사건은 가장 찜찜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당시 정권과 검찰이 의도했든 안 했든 강기훈씨는 ‘분신 정국’을 돌파하는 희생양이 됐다. 1991년 4월 26일 명지대 신입생 강경대씨가 시위 중 경찰의 쇠파이프에 맞아 숨지자, 대학생과 노동자들이 “정권 퇴진”을 주장하며 분신자살하는 사건이 잇따랐다.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사회부장 김기설씨는 5월 8일 서강대 본관 5층 옥상에서 분신 후 투신 자살했다.

검찰은 숨진 김씨의 양복 상의에서 유서 2장이 나왔는데 동료인 전민련 총무부장 강씨가 대신 썼고 자살을 방조했다고 수사결과를 발표했다. 김씨가 죽기 사흘 전 김지하 시인은 조선일보에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는 기고문을 실어 파문을 일으켰다. 검찰은 운동권의 일부 세력이 정권 퇴진 시위를 확산시키기 위해 동료의 분신자살까지 유도하는 반 인륜적 사고를 갖고 있다고 보았다. 검찰이 ‘유서 대필’을 발표하자 공안 정국이 조성됐고 분신자살은 잦아들었다.

당시 검찰의 수사 팀원이었던 변호사는 대법원의 무죄 판결에 대해 “조선시대에 세종대왕이 한 판결도 지금의 잣대로 하면 결론이 달라지는 게 많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사건은 법 이론이나 주관적 판단의 문제가 아니라 사실의 문제다. 대법원은 “1991년의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필적 감정 결과는 신빙성이 없다”며 지난해 2월 서울고법의 원심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이 사건은 드레퓌스 사건을 연상시킨다. 1894년 프랑스 포병 대위 드레퓌스는 독일에 군사기밀을 팔아넘긴 반역자로 몰려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프랑스 정부는 기밀서류의 서체가 드레퓌스의 필적과 비슷하다고 내세웠지만 반유대주의가 확산하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유대인 출신 드레퓌스를 희생양으로 삼은 것이었다.

참혹한 고통을 당한 강씨는 지금 간암을 앓고 있다고 한다. 24년 동안 억울함으로 속을 끓이며 살았을 테니 몸과 마음이 온전할 리 없다. 사법부과 검찰은 지금이라도 강씨에게 깊이 사과하고 성찰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 돌이켜 보면 사법부와 검찰은 이 사건에서 법치를 구하지 않고 정치를 한 것으로 여겨진다. 당시 기자로서 제 역할을 하지 못한 필자도 용서를 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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