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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일반

고모님 생신날 정처 없이 떠난 피난 길

경북동부신문 기자 입력 2015.07.08 09:29 수정 2015.07.08 09:29

최 홍 준 본지노설고문

ⓒ 경북동부신문
음력으로 7월 23일이 나보다 다섯 살 위 중간 고모 생일인데, 6?25가 나던 그해의 이날은 양력으로 9월 5일 화요일이었다. 아침에 미역국을 끓이고 생일상을 차렸으나 멀리서 가까이서 대포 소리가 쿵쾅거리고 마음들도 어수선해서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어쩌는지도 모른 사이에 피난길을 서둘러야 했다. 그 유명한 ‘영천전투’가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다.

영천전투는 다 알고 있는 바와 같이 1950년 6·25 당시 국군 제2군단이 영천지역으로 침공한 북한 공산군을 격퇴하고 방어에 성공한 전투를 말한다. 결과부터 말하자면 영천탈환을 계기로 우리 국군은 낙동강전선의 동반부를 방어하는 데 성공했고, 이때부터 6·25의 전세가 역전되어 한국군과 유엔군이 반격작전으로 전환할 수 있는 발판을 굳히게 됐던 것이다. 북한 공산군은 8월 공세에서 다부동 전투와 대구에 대한 공격이 실패하자 제15사단을 의성을 거쳐 영천으로 이동시켰다. 이는 영천을 점령한 후 대구 또는 경주로 진격한다는 의도였다.

영천은 내가 생명을 얻어 자란 곳이요, 아버지, 할아버지, 또 그 윗대 조상님들이 터를 잡고 사셨던 고장이며 고향이다. 우리는 본관이 경주였으므로 경주 근교에 조상들이 사시다가 1세기 쯤 전에 영천으로 옮겨 정착하셨다고 한다. 영천읍 조교동이 본적지이고 내가 자란 동네다. 영천읍의 동쪽 끝인 ‘존다리’[早橋] 삼거리에서 왼쪽 북으로 가면 포은 정몽주 선생을 모신 임고서원이 있는 임고면이고, 동쪽 포항쪽으로 곧장 가면 고경면인데, 금호강을 건너야 단포(丹浦)에 이른다. 경리학교, 정보학교, 부관학교, 헌병학교 등 군사 4개 학교가 휠씬 후 단포에 설립돼 지역발전에 크게 이바지한 것이 사실이다.

아무튼 영천은 대구와 포항의 중간에 위치한 교통의 중심지로서, 적이 영천을 점령해 대구로 진출할 경우 다부동 일대의 국군과 미군이 위험에 처해 낙동강 방어선 전체가 붕괴될 수 있고, 경주로 진출할 경우에는 부산교두보가 위협받을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전투는 주로 영천 북쪽과 남쪽에서 이루어졌다. 9월 5일 북한군 제15사단은 비가 내리는 가운데 3개 방면에서 공격을 해왔고, 이날 우리는 피난길을 나섰던 것이다.

9월에 들어서면서 위협을 느낀 가운데 전날 저녁 주민 소개령(疏開令)이 내렸던 모양이다. 동네 사람들은 피난 갈 준비를 서둘렀고, 읍사무소에 다니시던 선친은 미리 비상금을 마련해 어른들에게 조금씩 나눠주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혹시 뿔뿔이 흩어지면 돈이 쓰일 데가 있을 거라고 여겨서 그러셨던 것인데, 정작 나는 현금을 배당받지 못한 가운데 이날 아침 그만 이산가족이 되고 말았다.

이때 우리 집에는 할아버지, 할머니를 비롯해서 아버지와 어머니, 남자 동생 둘, 여동생 하나, 이렇게 우리 소가족 다섯 식구 외에 막내 삼촌과 고모 둘이 살았고, 임고에 사시던 할머니 여동생 식구도 전쟁통에 와서 지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바로 앞집에는 할머니의 친정어머니인 분다 할머님이 사셨는데, 한집에 살고 있었던 바우네 일가족이 노할머님을 모시고 떠난다고 하면서 우리 집 마당에 와서 피난길을 재촉하는 것이 아닌가.

우리 본집은 식구도 많았거니와 할아버지께서 피난 가지 않고 집을 지키겠다고 버티시는 바람에 할머니와 아버지가 선뜻 행동에 옮기지 못하신 것이고, 어머니는 겨우 여덟 달이 조금 더 지난 젖먹이 아들 베드로를 챙기랴, 생일상 치우랴, 정신이 없으셨던 아침이었다.

그 동안 북쪽에서 온 피난민들이 먹을 것, 입을 것을 구하러 우리 집에 자주 드나들었던 것을 떠올리면서 나는 ‘우리도 피난을 가는구나!’하는 마음으로 마당에서 서성대다가 내 또래의 바우를 따라 노할머님 행차에 따라 나섰던 것이니, 가다가 어디서 가족들을 만날 수 있으려니, 하고 나선 피난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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