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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북동부신문 |
분다 노할머님은 딸만 셋을 두신 가운데 일찍 홀로 되셨고, 마르티나 세례명을 가진 우리 할머니가 둘째였으며, 담 한 장을 사이에 하고 바로 우리 앞집에 살고 계셨다. 둘째 사위인 우리 토마스 할아버지가 장모님을 잘 모신 셈이었는데, 피난 가기 며칠 전에 두 분이 나눈 대화가 미소를 머금게 한다.
“장모님과 저는 피난 가지 말고 집이나 지킵시다. 우리 같은 노인네를 누가 해치기야 하겠습니까?”
“글쎄….”
어정쩡하게 대답하신 노할머니는 피난 당일 서둘러 피난길을 떠나셨고, 할아버지의 맏손자인 내가 그 길에 따라나섰던 것이다. 노할머니 댁에 살던 ‘호갑씨’라고도 했고 ‘이씨’라고도 불린 바우 아버지, 바우 어머니, 바우와 바우 동생 상옥이까지 네 식구와 노할머니, 나, 이렇게 여섯 사람이 일행이었다. 바우 아버지는 우리 집 농사일을 전적으로 도와주는 관계였고, 우리 집 마구간에서 고삐를 풀어 소를 몰고 피난을 떠났다.
그런데 첫날밤이 지나고 둘째 날이 지나도록 식구들의 소식조차 들을 수가 없었다. 차츰 걱정이 됐고, 끼니때마다 나는 십자가를 그으면서 바치는 성호경을 꼭 세 번씩 뇌[念]고는 했다. 한 번은 아버지를 위해서, 둘은 어머니를 위해서, 그리고 셋은 젖먹이 아우 베드로와 다른 가족들을 기억하며 모두의 안전을 하느님께 빌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전투가 한창 벌어지고 있는 곳에서 가족과 헤어진 것 자체로도 비극인데, 모두들 집을 나서기는 했는지, 행선지를 어디로 잡았는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집을 지키겠다고 막무가내이신 할아버지를 모시지 못한 채 가족들이 길을 나서긴 했으나 영천읍내에서도 남쪽으로 곧장 가는 동안 인민군을 엄청 많이 만나게 되더라는 것이었다.
도동을 거쳐 작산을 지나 지금 경부고속도로 영천 IC 방면으로 피난을 갔으니, 경주로 가는 길목이었고, 적군이 장악한 지역으로, 전투가 치열했던 그 한복판을 피난처로 잘 못 알고 발길을 옮겼으니, 얼마나 위험한 길이었던지! 하루는 닭죽을 끓여서 온 가족이 식사를 하는데, 인민군이 자기네들을 위해서도 끓여 오라고 강요했고, 마지못해 음식을 장만해갔더니 “이따위가 뭐냐”면서 다시 끓여오라고 호통까지 치더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대구와 경주로 진출하려던 북한군에 맞서 국군 제2군단 예하 제8사단과 제7사단이 주축이 되어 벌인 영천전투에서 국군은 영천∼경주간 도로를 확보한 다음 영천 방면의 북한군을 격퇴하기 위해 9월 10일 반격작전을 전개했다.
이들 2개 사단을 작전계획에 따라 배치하고 남, 서, 북쪽의 3개 방면에서 공격을 개시했다. 이 작전으로 국군은 적 제15사단의 전차와 화포 대부분을 파괴하고 노획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결국 영천을 탈환하고, 경주 방면으로 진출을 꾀하던 적 제2군단에 맞선 국군은 제8사단과 제7사단 외에 추가 연대를 투입해 방어조치를 취하는 등 영천전투를 통해 낙동강 방어선을 고수할 수 있었다.
국군이 수세에서 공세로 바꾸는 전환점이 된 영천지구 전투는 북한의 제15사단이 치명적인 타격을 입고 물러나는 계기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국군이 총공세를 단행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한 의미 있는 전투였다.
우리 국군이 1950년 9월 5일부터 13일까지의 공방전을 통해 공산군을 격퇴하고 영천을 확보한 이 아흐레 동안의 전투에서 우리의 피난살이도 9월 5일 시작해서 열흘 남짓 계속됐다. 아버지와 우리 가족들은 전투가 벌어지는 현장에서 피난생활을 했으므로 전투가 끝난 바로 다음날 귀가할 수 있었지만, 노할머니를 모시고 바우네와 함께 한 우리 일행은 서남쪽 대구 방면인 경산군 진량면 평사리, 지금의 경부고속도로 평사 휴게소 부근으로 피난을 간 덕분에 아주 평화로운 피난살이를 하고 하루인가, 이틀을 더 기다렸다가 안전하게 집에 돌아올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