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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연재·소설

[연재소설] 고깔을 쓴다

경북동부 관리자 기자 입력 2026.04.29 09:53 수정 2026.04.29 09:55

한 관 식 작가

ⓒ 경북동부신문
말똥구리(19)
“대장나리, 내키지 않은 걸음 하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소인 벽보가 추명 합하와 호위대장 나리의 숨은 뜻을 받들어 이제 형을 집행할까 합니다. 부디 한걸음 물러서서 지켜봐주십시오. 궁녀와 폐위된 세자는 권력 교체 과정에서 강제적으로 목숨을 잃는 사례는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소옥은 동명의 방패막이를 자처하며 비장하게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중심을 흔들고 있는 나룻배는 강기슭 억새밭으로 바짝 붙여 기민한 움직임을 도왔다. 태열은 이런 상황의 심각성에 잠시 고민했다. 벽보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그대로 한번 외면하는 것이 합하를 위하는 건지, 처음 의도대로 유배지로 보내주는 것이 합하에게 득이 되는지 빠르게 머리를 굴려보았다. 이내 나름대로 해답을 찾았다.
“이 시각에 동명세자를 모신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는가? 뱃사공과 동무인가?” 
으르릉 거리는 벽보를 두고 사공이 날름 대답을 했다. 
“벽보와는 어릴 적 깨알 동무입니다. 나리.”
이 정도의 흐름이라면, 자신의 행동이 허락받았다고 생각되었는지, 벽보는 소옥과 동명을 향해 멧돼지처럼 저돌적으로 덤벼들었다. 기회를 엿보며 지팡이 칼집에 들어있던 태열의 칼이 번쩍 허공을 갈랐다. 외마디 비명과 함께 벽보는 한손을 쥐고 버둥거렸다. 칼을 쥐고 있던 오른손 손목이 잘려져 피를 튀기면서 나룻배 바닥에 나동그라져 있었다. 짧은 시각에 잘린 손목에서 분리된 칼은 더 이상 위협적이지 않았다. 
“나리 너무하십니다. 어떻게 외팔이로 살게 하십니까?”
“분명 추명 합하의 명을 받았다고 하지 않았는가. 무사히 유배지로 보내주라는 명이 귓가에 생생한데, 자신의 판단을 믿고 그릇치는 행동은 용서할 수가 없다. 썩 배에서 내려라. 잘린 손목을 평생 보면서 경거망동의 더 큰 화를 막는데 본보기가 되어라.”
하얗게 질린 얼굴로 사공은, 억새밭에 내려 절단된 손목에서 뿜어 나오는 피를 막기 위해 억새줄기로 감싸는 벽보를 몇 번 돌아보는 것 밖에 달리 뾰족한 수가 없었다. 굼돔부락 유배지를 향해 나룻배는 바람을 타면서 물살을 탔다. 서툴지 않는 노질로 굳은살이 밴 손바닥을 자랑스러워하던 사공은 엇박자로 삐거덕 거렸다. 동명과 소옥과 태열은 아무 말 없이 한 번씩 노질을 도왔다. 이제 세자가 아닌 어느 몰락한 양반의 마을백성처럼, 궁녀가 아닌 소박맞아 새 둥지를 찾아 나선 억척의 아낙처럼, 왠지 안개 속을 헤매면서 확신이 없는 상처 입은 들짐승처럼 세 사람은 각기 받아들이려고 노력했다. 
멀리 굼돔부락이 보였다. 입구부터 울울창창(鬱鬱蒼蒼) 유배지의 면모를 갖추고 있었다. 큰 나무들은 햇살을 가리며 아주 빽빽하게 우거져 쉽사리 속내를 드러내지 않았다. 자호천의 폭이 넓어져 더욱 음산한 기운을 품으면서, 보기에도 실한 고기들은 작은 고기들이 튕겨져 오른 허공을 순식간에 채웠다. 인간의 발길이 뜸했기에 멀리 고향을 등진 애틋한 그리움들이 뿌리 내리기 좋은 최적의 장소였다. 또한 외롭고 고단한 하루의 한(恨)들이 삭아서 흘러가는 곳이기도 했다. 태열은 길섶에서 튼실하게 뻗은 휘어진 나뭇가지를 붙잡고 동명과 소옥을 내려주었다.
“여기까지입니다. 나리, 살아남으십시오! 소옥은 어떤 경우에도 보필해 드려야 한다. 그것만이 네가 살길이다! 앞으로 쭉 가시면 집 한 채가 나올 겁니다. 어느 정도 기본은 갖춰져 있기에, 적응 하셔야 합니다. 부디 만수무강하시옵소서.” 
작별인사를 듣지 않고 서둘러 사공에게 왔던 길의 노질을 재촉했다. 얼마가지 않아 나룻배에서 외마디 비명과 함께 선혈범벅이 된 사공이 자호천에 풍덩 버려지는 것이 보였다. 
“비밀을 누설한 죄, 죽어 마땅하지 않습니까?”
아득하게 시작점에 선 동명과 소옥은 우렁찬 태열의 목소리를 들어야 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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