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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일반

[기고] 산남의진열전(山南義陣列傳) 230

경북동부 관리자 기자 입력 2026.05.06 09:11 수정 2026.05.06 09:15

조충래 전원생활체험학교장 본보 논설주간

ⓒ 경북동부신문
부모와 자식의 인연은 참으로 지중합니다. 피는 물보다 진해서 어떤 경우에서도 핏줄을 앞세우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특히 어머니의 자식사랑은 지나칠 정도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를 「부모은중대승마하반야바라밀경(父母恩重大乘摩訶般若波羅蜜經)」<다생부모십종대은(多生父母十種大恩-여러 생 부모의 열 가지 은혜>를 통해 볼까요? 가정의 달 5월, 어버이의 날을 맞아 한 글자 한 글자 곱씹어볼 만한 내용입니다.
1. 아기를 잉태하여 지키고 보호해주시는 은혜를 찬탄하다.
여러 겁 동안 맺은 귀중한 인연으로 금생에 다시 어머니의 태에 의탁하였네. 한 달 한 달 달이 지나감에 오장이 생기고 일곱 달에 접어들어 육정이 열리었네. 어머니의 몸이 무겁기는 마치 태산과 같고 거동할 때는 바람만 불어도 재앙이 될까 겁을 내시네. 아름다운 비단옷은 모두 입지 않으시고 매일 단장하던 거울에는 먼지만 쌓여있네.
2. 나를 낳으실 때 고통을 받으며 수고하신 은혜를 찬탄하다.
아기를 잉태하고 십 개월에 이르면 어려운 해산달이 하루하루 다가오네. 아침마다 일어나면 중병에 걸린 몸과 같고 하루하루 지날수록 정신마저 혼미해지네. 두렵고도 떨리는 마음 어찌 다 표현하며 근심 걱정은 눈물이 되어 옷깃을 가득 적시네. 슬픔을 머금고 친족에게 이르기를 오직 죽음이 찾아오지 않을까 두렵다고 하네.
3. 자식을 낳고 모든 근심을 잊어버리신 은혜를 찬탄하다.
자애로운 어머님이 그대를 낳는 그때 오장육부가 모두 갈라지고 터지는 듯하네. 몸과 마음이 모두 괴로워 혼절한 듯하고 흐르는 피는 양을 잡은 것과 같네. 낳은 아기가 건강하다는 말을 듣고 기쁜 마음 평소보다 갑절이나 되네. 기쁜 마음이 진정되니 슬픈 마음이 되살아나 아픔과 괴로움이 가슴속에 사무치네.
4. 쓴 것은 삼키시고 단 것은 뱉어 먹이시는 은혜를 찬탄하다.
부모님의 은혜는 깊고도 무거우며 끝없는 자식 사랑은 잠시도 쉬지를 않네. 단것은 뱉어서 아기에게 먹이느라 잡수실 것이 없고 쓴 것은 삼켜도 눈썹 한번 찡그리지 않네. 자식에 대한 사랑이 무거울수록 깊은 정은 참기 어렵고 은혜가 깊으니 슬픔이 또한 더하도다. 오로지 어린 자식 배를 불리고자 자애로운 어머니는 굶주림도 마다하지 않네.
5. 아기는 마른자리에 뉘고 당신은 진자리에 눕는 은혜를 찬탄하다.
어머니 당신 자신은 젖은 자리에 누우시고 아기만은 언제나 마른자리에 누이시네. 두 젖으로 배고픔과 목마름을 채워주고 고우신 소맷자락으로는 찬바람을 가려주네. 사랑으로 아기를 돌보느라 잠들 때가 없으셔도 사랑스러운 아기의 재롱으로 기쁨을 다하시네. 오로지 아기가 편안하기만을 생각하며 자애로운 어머님은 편안함을 바라지 않네.
 
권석문
관향과 살던 곳을 모르며 그 전말(顚末) 또한 분명하지 않다.
〈원문〉
權錫文은 貫鄕及居所不詳이고 顚末亦不詳이라 

<山南倡義誌 卷下71p>

權錫文 義士 略歷(권석문 의사 약력)
權錫文(권석문)은 관향은 안동이요 출신지도 미상이고 전말도 미상이라
<山南義陣遺史517~518p>

강대근
관향과 살던 곳은 분명하지 않다. 누군가 총을 잘 쏘는 재주가 있어 적과의 교전 시에 반드시 선두로 나섰다고 말하는데 그 전말(顚末)은 분명하지 않다. 
〈원문〉
姜大根은 貫鄕及居所不詳이라 或言有善射之才하야 交戰時必進先頭云이고 顚末不詳이라
<山南倡義誌 卷下71p>

姜大根 義士 略歷(강대근 의사 약력)
姜大根(강대근)은 관향은 晋州(진주)라 본래 렵수로서 입진하여 명사수로 칭찬이 있더니 전말은 미상이라 <山南義陣遺史518p>

강대근의사 공훈록
1891년 2월 23일 경상북도 영일군(迎日郡) 죽장면(竹長面, 현 포항시 북구 죽장면) 상옥리(上玉里)에서 출생하였다. 자는 성구(聖九), 본관은 진주(晋州), 이명은 대삼(大參)이라고도 하였다. 성장하면서 포수(砲手)로서 활을 잘 쏘아 선사지재(善射之才)로 알려졌다.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면서 나라가 송두리째 무너져가는 위기 속에서 고종의 밀조(密詔)를 받은 정환직(鄭煥直)이 장남 정용기(鄭鏞基)에게 영남(嶺南)으로 내려가 의병을 일으키도록 지시하였다. 정용기는 고향인 경북 영천(永川)에서 이한구(李韓久)·손영각(孫永珏) 등과 더불어 1906년 3월 ‘산남의진(山南義陣)’을 일으켰다. 의병부대의 조직으로는 본부에 대장 아래 참모장·중군장·소모장·선봉장·후봉장·좌영장·우영장·도총장·연습장 등 여러 부서를 두었는데, 이때 포수 출신으로서 대장의 본영(本營)에 참여하였던 것 같다. 의병부대는 1906년 (음)4월 28일 일본군에 패한 신돌석 의병부대를 돕고자 영해(寧海)로 진군하다가 현재의 포항시 북구 신광면(神光面) 우각(牛角)에서 ‘아버지 정환직이 구속되었으니 의논할 일이 있다’라는 경주진위대(慶州鎭衛隊)의 연락을 받았다. 이에 놀란 정용기 대장이 홀로 경주로 갔다가 구속되고 말았다. 의병부대는 중군장 이한구에게 맡겨졌으나 1906년 7월 하순경 해산되었다. 1906년 9월 정환직의 주선으로 풀려난 정용기는 이듬해 4월 북동대산(北東大山)에서 재기하였다. 1907년 7월부터 본격적인 진군을 시작하면서 관동(關東), 곧 강릉(江陵)으로 북상할 길을 찾았다. 그러나 길목마다 일본군이 가로막고 있었다. 의병부대는 여러 지역으로 나누어 내보내고 본영 100여 명은 10월 6일 영일군 죽장면 매현(梅峴)으로 들어가 주둔하였다. 이튿날 7일 저녁 일본군이 죽장면 입암(立巖)으로 들어온다는 정보를 획득하고 연습장 우재룡(禹在龍), 우포장 김일언(金一彦), 후봉장 이세기(李世紀)를 세 방향으로 내보내 일본군의 퇴로를 막도록 하고, 본영은 10월 8일 새벽에 일본군을 공격하기로 계획하였다. 10월 7일 오후 9시 30분 이세기 부대가 입암리를 지나다가 원촌(院村) 마을에서 일본군 몇 명이 식사 준비를 하는 모습을 목격하고 성급하게 공격을 하였다가 매복해 있던 일본군의 집중 공격을 받아 패하여 흩어지고 말았다. 이 소식에 놀란 본영은 죽장면 입암으로 진격하였다. 10월 8일 새벽 원촌마을에 도착하였으나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일본군의 맹렬한 공격을 받았다. 약 2시간 동안 격전을 치렀지만, 대장 정용기와 중군장 이한구 등 여러 장령과 병사들이 전사하고, 또 부상을 당하였다. 이때 중상을 입고 간신히 피신한 후 은신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국가보훈부 공훈전자사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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