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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일반

[기고] 산남의진열전(山南義陣列傳) 233

경북동부 관리자 기자 입력 2026.05.27 09:32 수정 2026.05.27 09:36

조충래 전원생활체험학교장 본보 논설주간

ⓒ 경북동부신문
지난 5월 24일은 불기 2570년 부처님오신날입니다. 부처님오신날은 무슨 의미를 가질까요? 어떤 사람에게는 절에 가는 날이 되었을 것이고, 어떤 사람은 연휴를 즐길 수 있는 날이 되었겠지요.
생각건대, 아마도 지금 우리 사회에서 모두가 추구하는 최상의 가치는 「자유」일 것입니다. 사전적 의미로 자유는 외부적인 구속이나 무엇에 얽매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국가나 조직이 우선시되던 사회에서 개인의 자유를 더 소중하게 다루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자유 민주주의 사회에서 인권이나 자유는 제한되어서는 안 되는 소중한 가치임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과연 진정한 인권이나 자유가 실현될 수 있을까요? 분명히 대한민국 국민은 누구나 자유를 누릴 수 있다고 헌법이 명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누군가 강요하지는 않는 여러 가지 외부적인 구속, 특히 경제적인 이유로 매우 제한적인 자유를 누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욕구 불만족이나 상대적 박탈감으로 나타나 사회적 불안 요소가 되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돈이 없어서 먹을 것을 사지 못하거나 병원에 갈 수 없는 경우, 누가 강제하지는 않지만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자유롭지 못한 거죠. 국가나 사회의 복지가 향상되면서 점점 좋아지겠지만 그만큼 개인의 욕구도 그만큼 상승되어 결국은 ‘자유롭지’못한 것이 현실입니다. 
지금 이 시점에서 우리는 진정한 「자유」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인류사에서 참자유를 찾아서 누리고 그것을 설파한 분이 고오타마 붓다, 석가모니 부처님입니다. 그런데 불교에서 말하는 자유는 외부의 구속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자기로부터의 해방을 말합니다. 바른 견해와 깊은 사유를 통해 눈앞에 일어난 현상을 관(觀)함으로서,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무상(無常)의 이치와 ‘내가 지어서 내가 받는다.’라는 인과(因果)의 도리를 알게 됩니다. 또한 욕구를 절제할 줄도 알게 되죠. 그러면 외부의 어떤 것이나 자기의 욕망에 얽매이지 않아 자유롭습니다. 2650년 전에 부처님께서 이땅에 오신 이유를 우리는 여기에서 찾습니다. 비록 한 나라의 왕자이지만 스스로 자유롭지 못함을 알고, 출가 수행함으로서 몸소 자유를 획득한 대자유인이 되어 누구나 자유인이 될 수 있음을 가르치고자 오신 것입니다. 그분은 깨달은 자가 되신 후 45년간의 발자취를 통해 어디에도 걸림이 없는 자유인의 삶을 실천하고, 그것을 가르치고, 그것을 드러내 보였습니다. 탐욕이나 성냄, 그리고 어리석음에서 벗어나는 것은 누가 가르쳐서 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자유의지를 통해 구현됨을 말이죠. 일체의 괴로움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외부적인 구속이나 그 무엇에도 얽매이지 아니하고 자유롭다는 말입니다. 아, 自由여! 大自由人이시여!

김각국
본관은 경주이다. 누군가 경주 기북에 살던 사람이라고 말하는데, 그 전말(顚末)은 분명하지 않다.
〈원문〉
金覺國은 慶州人이요 或言慶州杞北居人이요 顚末不詳이라

 <山南倡義誌 卷下72p>

金覺國 義士 略歷(김각국 의사 약력)
金覺國(김각국)은 관향은 慶州(경주)요 慶州杞北(경주기북) 出身(출신)이라 전말은 미상이라<山南義陣遺史519p>

최돌이
관향은 분명하지 않고 누군가 경주 기계 등지에 살던 사람이라고 말했다. 일찍 부모님을 여의고 형제 두 사람이 외롭게 서로를 의지하면서 남의 집에 품을 팔고 살았다. 배우지도 못하고 의지할 데도 없는 사람이었다. 급기야 일본인들이 우리나라에 들어옴에 이르러 형제가 사로 의논하여 “이제 부모의 나라가 위급함에도 우리들이 어찌 이를 남의 일 보듯 하겠는가?”하고는 그날로 산남의진에 들어와 각 지역으로 진출하여 맡은 바 직분에 최선을 다하며 충성스럽게 싸웠다. 멀고 가까운 곳에서 이들 형제의 일을 들은 사람들은 스스로 감격하고 감화되어 산남의진에 찾아 들어온 사람이 많았다. 의진이 실패를 거듭하자 최돌이는 급기야 만주로 건너갔다고 전해진다.
〈원문〉
崔乭伊는 貫鄕不詳이요 或言慶州杞溪等地居人이라 早失父母하고 兄弟二人이 孑孑相依하야 爲人之雇傭而不學無賴之徒也라 及倭之入國에 兄弟相議曰今父母之國이 有危而吾等이 豈能岸視乎아하고 卽日入陣하야 進戰各地에 血心奉職하니 遠近聞之者有感激之心하야 入陣者多矣러라 及大事敗에 渡滿云이러라
<山南倡義誌 卷下72p>

崔聲七 義士 略歷(최성칠의사 약력)
崔聲七(최성칠)은 관향은 月城(월성)이요 의진에 종사할 때에 이름은 乭伊(돌이)라 慶州杞北(경주기북) 出身(출신)이라 입진하여 銃炮監(총포감)으로 있다가 의진이 전말되고 은신하다
 <山南義陣遺史520p>

최돌이의사 공훈록
경북 영일(迎日) 사람이다. 1906년 3월 경북 영천(永川)에서 정용기(鄭鏞基) 등이 산남의진(山南義陣)을 조직하자 아우 최차돌(崔且乭)과 함께 그 휘하에 들어가 항전을 개시한 이후 정용기 사후에는 그 부(父) 정환직(鄭煥直)을, 정환직 사후에는 다시 최세한(崔世翰)의병장을 따라 활동을 계속하다가, 1908년 3월 산남의진의 해체와 더불어 활동을 종료한 뒤, 아우와 함께 중국 동삼성(東三省)으로 망명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출처: 국가보훈부 공훈전자사료관>

최차돌
돌이의 동생이다. 그의 형을 좇아 의진에 들어왔다가 형을 따라 몸을 피했다.
〈원문〉
崔且乭은 乭伊之弟也라 從其兄入陣이라가 隨其兄避身하다
 <山南倡義誌 卷下7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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