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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 135번지에 가면 윤봉길 의사가 태어나서 어린 시절을 보낸 광현당(光顯堂)이란 생가가 있다. 광현당은 ‘빛이 나는 곳’이란 뜻으로 그의 증조부인 윤자 때부터 이곳에 정착하여 살았다고 한다. 이곳은 사방으로 냇물이 흐르는 지형으로 “조선 반도 속의 섬”과 같아 ‘도중도(島中島)’라는 지명을 윤봉길 의사가 직접 붙였고, 왜놈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이라 하였다. 그는 이곳에서 1908년 6월 21일 아버지 윤황과 어머니 김원상의 장남으로 태어나 4세까지 성장한 곳이고 이후 아버지 윤황을 따라 강 건너 저한당(抯韓堂)으로 거처를 옮겼다. 저한당이란 택호는 ‘한국을 건져내는 집’이라는 뜻이며 그는 이곳에서 10세에 덕산보통학교에 입학을 했다. 그런데 이듬해에 3.1운동이 일어나자 애국심이 고취된 그의 어머니는 식민지배자의 교육을 받지 않겠다며 아들을 자퇴시켰고, 그런 후 한문 공부를 하며 독립운동과 농촌 계몽운동을 하는 데 어머니께서 적극적으로 도왔다고 한다. 윤 의사는 1930년 어느 날 이러한 활동에 한계를 느끼고 집을 떠나면서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 장부가 집을 떠나면 뜻을 이루기 전엔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 이란 글을 남기고 만주로 건너갔다. 만주에서 김구 선생을 만나 조국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칠 것을 다짐하고 그는 한인 애국단에 입단했다. 애국단 생활 중 사변이 격화되자 고향의 어머니에게 이번의 상해 사변은 확전될 것 같다며 편지를 보냈는데 어머니로부터 ‘집은 걱정말고 너 갈 길을 가라’는 답을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두 달 후 1932년 일본 천황의 생일과 중국 상하이를 점령한 전승 기념 행사장에 몰래 들어가 폭탄을 던져 일본군 대장과 거류민 단장을 폭사시키고, 군 지휘관들에게 중상을 입히는 거사를 치른 후 체포되어 총살형을 당했다. 이 사건은 세계를 뒤흔들어 세상 사람들을 감격케 했으며, 정부에서는 그의 항일 독립운동 공적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이듬해 덕산면 고향에 충의사를 세워 그를 기리고 있으며 1972년 유적지와 생가지 전체를 사적 제229호로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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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북동부신문
이곳의 산세는 금북정맥 줄기인 예산군 덕산면 덕숭산(495.2m)에서 동북쪽으로 하나의 지맥을 뻗어와 덕산면 둔리에서 150m의 봉우리를 일으켜 생가의 주산이 되었다. 이곳 집터는 사방이 물에 둘러싸여 있고 그 가운데 떠 있는 형상이라 풍수에서는 이러한 형국을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의 명당 터로 해석한다. 풍수서 『朝鮮의 風水』에서는 연꽃은 꽃도 열매도 구비된 원만한 꽃이므로 모두 원만하고 고귀하면서 화려한 생할을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곳 광현당의 수세는 대치천이 집의 북쪽을 감싸고 흐르고 둔리 저수지에서 흘러나온 호곡천은 집의 남동쪽을 에워싸고 흘러 도중도 동편에서 합수 후 삽교천으로 흘러든다. 이렇듯 수세는 집을 환포하며 흘러 유리한 조건이나 주변 사신사가 장풍의 조건에 합당하지 않아 바람의 피해가 예상되는 곳이다. 강 건너 저한당은 가야산 줄기인 원효봉(604.7m) 자락의 끝 지점에 위치해 있고 이곳 역시 산세와 수세가 풍수 원칙에는 어긋나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