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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기 때문에 저것이 일어난다.’ 이 연기법에서 ‘이것’은 원인이고 ‘저것’은 결과입니다. 다시 말하면 어떤 것도 그냥 존재하거나 우연히 존재하거나 만들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원인에 의한 결과적 존재로 나타나는 인과(因果)에 의존한다는 것입니다. 고(苦)도 마찬가지입니다. 매우 위태로운 어려움이 닥쳤음에도 불구하고 꿀 몇 방울의 맛에 빠지는 집착이 고의 원인입니다. 왜 이런 집착이 생길까요? 붕교에서는 오랫동안 윤회를 거듭하면서 삼독(三毒)에 젖어 있어서라고 말합니다. 세 가지의 독(毒)은 탐애(貪愛)와 진에(瞋恚) 그리고 치심(癡心)을 말합니다. 욕망의 충족을 통한 쾌락은 일시적이긴 하지만 거기에 맛을 들인 사람은 빠져나오기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탐욕(貪慾)이지요. 마찬가지로 화를 참지 못하는 습관에 젖은 사람은 분노의 조절이 점점 더 어려워집니다. 또한 여러 가지 조건으로 욕망의 충족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분노에 빠지게 됩니다. 진에(瞋恚)입니다. 이렇게 욕망과 분노에 빠지면 저절로 머릿속이 맑지 못하고 점점 어리석음에 물들어갑니다. 치독(癡毒)입니다. 이 세 가지의 독이 원인이 되어 집착의 병이 깊어지고 그 집착이 원인이 되어 괴로움이 결과가 생깁니다. 이것을 집성제(集聖諦)입니다. 지금 내게 주어지는 심리적 고통은 우연이 아니라, 과거부터 쌓아온 생각과 업이 원인이 되어 나타난 결과임을 알아차리는 것이 집성제를 관(觀)하는 올바른 자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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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북동부신문
林龍相 義士 略歷(임용상의사 약력)④
公(공)은 운문산에서 신병을 훈련시키고 그해 겨울을 이산에서 지나게 된다. 그 이유는 환경이 그렇게 되었다 산남의진 본부가 청송 등지에서 왜적들을 영양 봉화 등지로 몰아넣고 그 틈을 타서 다시 동해 방면으로 회군하여 흥해를 재차 함락시키고 청하를 경유하여 영덕에서 왜적들을 더불고 큰 교전이 있었다. 그 교전에 또 군수품이 핍절되고 그때에 왜적들은 산남의진을 목표로 하고 사방으로 몰려들어오는 숫자가 수천 명이라 이것을 대항하기 위하여 약탄을 구하고저 부대가 모두 각지로 파견되고 大將(대장) 東广先生(동엄선생)은 진터를 감찰코저 강원도로 들어가다가 청하에서 피금되어 영천에 돌아와서 순절하시었다 동엄선생이 대구로 압송될 때 부하 제장들이 대장을 탈환코저 하양 비로에 집합되는 연락이 있어 公(공)은 부하 장사 二三名(이삼명)을 대동하고 하양까지 출동하였고 장기읍을 진격하기로 약정하고 公(공)은 부하정병 수십명을 인솔하고 응원하여 장기읍을 함락시키고 다시 운문산으로 돌아와서 그곳에 훈련받는 부대를 단속하고 본진 동정을 기다렸다.
어언간에 그해 섣달이 지나가고 戊申年(무신년) 正月(정월)을 보내고 二月(이월)에 들어서서 산남의진은 전투방식을 갱신하여 출발하게 되었다. 崔世允公(최세윤공)이 본부대장으로 취임하여 본부는 남동대산에 웅거하고 그 다음은 百戰山下(백전산하)에 경험이 능숙한 각부 제장들이 모두 거산태령에 한 구역씩을 분담하여 유격전으로 적을 대항하기로 약속을 정하고 경상도 전역에 산남의진의 산발적으로 요새를 점령하다. 公(공)은 기위 점거하고 있는 운문산이 자위적으로 담당구역이 되었으니 내가 여기서 출발하려면 방위를 크게 생각해야 한다. 이 지역은 경상남북도 중심에 위치하여 북쪽은 고령 현풍 달성 대구 경산 하양 자인 경주에 연결되고 남쪽은 거창 합천 초개 창녕 영산 밀양 언양 울산에 접근되어 있으니 가위 국내에 유일한 지역이요. 이런 관계가 있는 때문에 옛날 壬辰(임진)란에도 四十義士(사십의사)가 이 청도에서 창의하여 이 고향을 확보한 것이다. 지금 우리도 二百(이백)여명 되는 군인들이 이곳에서 四五個月(사오개월)을 지났으니 그 동안에 인근지방 數十(수십) 고을의 겪은 수고가 얼마이며 더구나 청도군내에 성거하는 數十門中(수십문중)이 우리를 도와주는 그 공덕을 잊어버릴 수 없으며 한 가지 원통한 일은 작년 세말에 八公山(팔공산) 연락을 받고 五十餘名(오십여명)이 출동하다가 영천지방에서 적과 교전되어 참패를 당한 일이 더욱 간절하다. 公(공)은 이러한 환경에서 앞으로 할 일을 생각하니 최후에 한 사람이 남을 때까지라도 싸워야 될 일편단심은 변경시킬 도리가 없었다. 각처로부터 들어오는 정보를 수집하니 운문산 주위에 어느 곳을 막론하고 이산에서 교통이 되는 길목은 전부 왜병들이 파수하고 있어 운문山(산)은 포위망 속에 들어있는 것이다. 公(공)은 부하들을 더불고 정한다 우리가 지금부터는 본부와 연락이 단절되었으니 자립 않고도 안 될 사정이요. 또는 왜적들이 저렇게 강세를 보이는데 여기서 이대로 죽는 것은 크게 무모한 일이라 江南(강남)지대로 이동하고자 하니 모두 준비하라. 그 자리에서 張俊灝(장준호) 權石出(권석출) 等(등)이 公(공)을 大將(대장)으로 추대하다.
戊申(무신) 二月(이월) 중순에 十名(십명)의 연락병을 경주 주사山(산)에 보냈다가 자인지방에서 왜적들과 교전되어 우리는 二名(이명)이 전사되었다. 그 익일에 선발부대 三十餘名(삼십여명)을 응원으로 보내서 그곳에 왜적들을 섬멸시키고 그 틈으로 우리 전군이 무사히 탈출하여 언양 양산 등지로 진출하다 밀양지방에서 무기를 장치하고 전군이 상인으로 변복하여 기장 동래 등지에 들어가서 화약과 차란 등속을 구입하는데 활약하였다. 약탄 등속을 개인별로 책임양을 지정하여 구입하였다 다시 밀양으로 돌아와서 무기를 휴대하고 영산읍을 습격하여 군수품 약간을 획득하고 창녕읍을 습격하여 약탄 등속과 기타 군수품을 다수 획득하여 청도 운문산으로 다시 돌아오다 그해 五月(오월) 초성에 정보를 수집하니 왜병들이 우리를 목표하고 운문산을 포위하고 있다. 하는지라 公(공)은 부하들을 명령하여 여러 골짝 길목에 복병을 시키고 여러 날 기다렸다. 하루는 경산 자인 방면으로 통하는 길에서 왜병수비대들이 올라오기 시작한다. 우리 의병들은 벌써 바위 뒤에 잠복하고 있었다. 왜병수비대 일행은 운문사 절 밑에 거의 도착되었다. 우리는 일제히 사격을 시작하였다. 왜병들은 거의 땅에 쓰러지고 그 나머지는 솔밭 속으로 도망하더라. 우리도 그날 밤에 영산 밀양 등지로 이동하다. 그달 중순이 되었다. 언양 땅에 들어섰다. 어느 날 언양읍 장날을 이용하여 정보원들을 농부로 변장하여 언양읍에 주둔하는 왜병들의 실태를 정탐하였다. 그날 저녁 어둠살이가 컴컴할 무렵에 왜병분파소 옆집에 불이 일어났다. 왜병들은 분파소에 불을 방비하기 위하여 일시 당황하게 된다. 우리는 이것을 일제히 사격하였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