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 ⓒ 경북동부신문 | |
사목일선에서 물러나 원로 사목자로서 생활하고 있는 주교님 한 분을 최근 만난 자리에서 손원일 제독(1908-1980)에 관한 옛이야기를 들었다.
우선 일반적으로 알려진 손원일 제독의 이력을 보면, 독립운동가 집안에서 태어나 1930년 상하이 중앙대학 항해과를 졸업하고, 독일 상선에서 승무원으로 일하며 국제 감각을 익힌 분으로, 1945년 광복과 함께 귀국한 다음, 일제가 두고 간 썩어가는 몇몇 목선밖에 없는 정말 ‘현시창’(꿈은 높지만 현실은 시궁창이란 뜻의 신조어) 그 자체에서 지금의 대한민국 해군의 틀을 닦은 ‘해군의 아버지’로 평가받고 있다.
“귀국 후 해안경비대를 창설하고 해군이 창설되면서 해군참모총장이 됩니다. 해병대를 창설했고 인천상륙작전의 사전 포석으로 영흥도와 덕적도에 상륙, 점령했으며 인천 상륙작전에도 참가했는데, 그보다 먼저 개전 초기 동해를 지킨 ‘대한해협 전투’야말로 우리가 결코 잊지 못할 일화가 있습니다.”
1949년 6월에는 ‘함정 건조기금갹출위원회’를 구성하고 모금 운동을 펼쳐 미국으로부터 백두산함(전쟁기념관에 주포가 전시돼 있음) 등 전투함 4척을 구입함으로써 대한민국 해군의 토대를 마련한 것인데, 특히 1950년 6월 26일 북한 특수무장 게릴라 600여 명을 태운 무장선이 울산 앞바다에 출현하자, 우리 전투함이 출동해 부산 앞바다에서 격침함으로써 후방에 침투해 교란작전을 펼치려는 북한군의 시도를 사전에 차단했다. 이 전투를 승리로 이끈 전투함이 바로 손 제독이 구입한 백두산함(PC-701)이었다.
“만약에 그때 600명의 공산군이 부산에 상륙해서 난동을 부렸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생각만 해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유엔군이 처음으로 전선에 투입된 것이 7월 5일이었고, 우리 정부가 대전을 거쳐 대구에서 부산으로 간 것이 7월 17일이었으며, 국군과 유엔군이 있는 힘을 다해 낙동강 방어선을 고수함으로써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을 펼 수가 있었던 것인데, 개전 초기에 부산이 위태로워졌다면 전쟁은 과연 어느 방향으로 달려갔을까?
이 전투가 얼마나 중요한 전투였던지, 현재 진해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대한해협해전도」를 보면 참으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준다. 대한해협 해전 장면을 그린 이 그림은 1978년에 정창섭(丁昌燮) 화백의 작품이며, 세로 179cm 가로 256cm의 캔바스 유화(油畵)이다.
‘백두산’의 대한해협 전투 승전은 거의 무방비상태로 놓여있던 부산항의 안전을 확보한 전략적인 사건이며, 이 전투가 지니는 의의를 전사(戰史)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첫째, 미군이 참전하기 이전 우리 해군이 단독으로 적 선박을 격침시켰다. 둘째, 부산으로 향하는 군수물자와 증원 병력을 위한 해상교통로의 안전을 확보했다. 셋째, 남해안 상륙을 기도한 적의 게릴라 부대를 격멸하여 후방교란을 미연에 방지하였다. 즉 한국전쟁의 발발 초기 후방으로 침투하는 북한군을 격퇴함으로써 부산 과 남해안의 안전을 확보한 의미 있는 전투였다.”
해군 관련 홍보자료 등에 따르면, 손원일 제독이 그 전해 1949년 10월 1일에 한국을 떠나 미 해양대학교로부터 ‘엔슨 와이트 헤드’(Ensign White Head, 백두)라는 퇴역 초계정(PC-823)을 18,000달러에 인수했다. 본국에 배 한두 척을 더 구입하겠다고 건의를 하자 이내 승낙이 떨어졌고, 주미 한국대사관에서 함정 구매신청서도 작성했다. 손 제독이 미 국무성으로 달려가 신청서를 제출하는데, 이때는 국무성 한국과장으로부터 무려 “돈이 있어도 못 팔겠다”는 무지막지한 대답을 듣고 만다. 흥분한 상태로 장면 대사에게 이끌려 국무성을 나온 손원일 제독은 일전에 PC-701 구입을 위해 만난 적이 있는 미 국방성 관계자를 찾아간다. 그러나 국방성 관계자가 와도 국무성 한국과장의 대답은 똑같았다. PF 이상의 전투함은 미국 정부에서 직접 관리하기 때문에 판매가 불가능하다는 설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