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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일반

瑞午칼럼) `애치슨 라인`

경북동부 관리자 기자 입력 2015.07.29 16:44 수정 2015.07.29 16:44

방송작가, 중아초등 7회 졸업,, 전 한국천주교평신도사도직단체 협의회장
본지 논설고문 최 홍 준

ⓒ 경북동부신문
워싱턴을 방문한 손원일 제독이 미 국방성을 찾아갔으나 PF급 이상의 함정은 팔지 않더라고 하는 이야기를 우리는 지난주에 나누었다. PF급은 ‘다목적 호위함’을 말한다. 6·25 한해 전인 1949년의 한반도 현실은 어떠했을까? 이보다 앞서 1945년 8월 15일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무조건 항복함으로써 남과 북에는 각각 미군과 소련군이 들어와서 군정을 실시했다.

광복 이후 정치적 혼란과 무질서 속에 있던 한국은 얄타 회담(1945년 2월)에서 이루어진 미국, 영국, 소련 정상들의 합의에 따라 소비에트 연방과 미국의 영향권 아래에 들어갔다. 국토의 중앙을 관통하는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남쪽에는 미국의 도움으로 대한민국이, 북쪽에는 소비에트 연방의 원조 아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성립되었다. 이미 1945년 12월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에서 ‘한국은 정부 수립 능력이 없으므로 5년간 미국 · 영국 · 중국 · 소련 4개국이 신탁 통치한다.’고 결정했고, 이로 인해 한반도에서는 신탁 통치 반대 운동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북쪽에서는 처음에 신탁통치 반대를 주장하다가 나중에 찬성 쪽으로 돌아섰고, 남쪽에서는 계속 반대 운동이 전개되었다. 한편 모스크바 3상회의에 따라 1946∼1947년 사이에 1차의 공동회담과 2차에 걸친 미소공동위원회가 개최되었으나 미국과 소련 간의 입장 차이로 해서 아무런 성과도 없이 무산되고 말았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9월 15일 부터 미국은 주한미군을 감축하기 시작했다. 11월 여수 순천 사건으로 잠시 철수가 중단되었다가 1949년 4월 다시 철수를 시작해 5월 28일 500여명의 군사고문단만 남기고 45,000명의 철수를 완료했다.

미군이 이미 철수한 상태에서 손원일 제독이 미국을 방문해 전함을 구입해오는 노력을 기울였던 것이다. 그런데 호위함보다 규모가 큰 배는 팔지 않겠다는 미국 측 반응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북한 공산군의 6·25 남침이 자행되기 5개월 남짓 전에 발표된 ‘애치슨 선언’과는 관련이 없는 것일까?

1950년 1월 12일 미국 국무장관 딘 애치슨(1893-1971)이 워싱턴 내셔널 프레스 클럽에서 열린 전미국신문기자협회에 참석해 ‘아시아의 위기’라는 제목으로 연설하면서, 스탈린과 마오쩌둥의 영토적 야심을 저지하기 위한 미국의 동북아시아 방위선을 재확인하는 발언을 했다. 태평양에서 미국의 지역방위선을 알류샨 열도 - 일본 - 오키나와 - 필리핀을 연결하는 이른바 ‘애치슨 라인’으로 한다는 것이었다. 그 결과 대한민국과 중화민국, 인도차이나 반도가 미국의 방위선에서 사실상 제외되었다. 이 선언은 중화민국 정부가 국공내전(國共內戰)으로 인해 타이완으로 천도한 것에 대한 미국 조야의 충격을 반영한 것이다. 더욱이 한반도는 이 당시까지만 해도 전략적으로 중요하지 않다는 인식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에 한국을 미국의 방위선에서 제외하게 됐다고 하는 후일의 평가도 나왔다.

애치슨의 이 선언 이후, 대한민국의 임병직 외무부장관은 즉시 주한 미국대사인 존 무초를 불러 애치슨 선언의 진의를 해명해 달라고 요구했고, 또 워싱턴 주재 장면 대사에게 훈령을 보내 애치슨 발언의 경위를 신속히 조사해서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애치슨은 한국이 미국의 극동방위권에서 제외된 이유에 대해 한마디 회답도 보내주지 않았다. 이후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애치슨의 선언에 그 책임이 있다는 비난이 있었고, 학자들에 따라서는 다른 견해를 보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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