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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일반

瑞午칼럼) ˝오! 필승 코리아, 대한민국~˝

경북동부 관리자 기자 입력 2015.08.12 15:50 수정 2015.08.12 15:50

방송작가, 중앙초등 7회 졸업, 전 한국천주교평신도사도직단체 협의회장
본지 논설고문 최 홍 준

 
ⓒ 경북동부신문 
2002년 서울 월드컵 대회에서 붉은 색 유니폼의 한국 축구대표팀을 응원할 때 우리는 모두 하나가 되어 “오! 필승 코리아. 대에한민국!”을 연호했다. ‘대한민국’(大韓民國)이란 국호(國號)가 그때처럼 우리 가슴에 와 닿았던 적이 또 언제였던가. 이 이름을 마음껏 불러본 것 또한 언제였던가! 나라 사랑하는 마음으로 ‘대한민국’ 국민임을 스스로 깊이 느끼게 해준 일이었다.

8월 15일은 우리에게 감격스럽고도 중요한 날이다. 70년 전 1945년 이날은 일제의 압제에서 벗어나 우리 민족이 해방을 맞이했던 광복의 날이고, 67년 전 1948년 이날은 대한민국 건국을 세계만방에 선포한 날이기 때문이다.

제헌국회가 선출한 초대 대통령은 이승만(李承晩, 1875-1965) 박사였고, 6·25전란 중 부산에서 직선제 개헌을 거쳐 1952년 제2대 대통령과 제3대 부통령을 뽑는 선거에서 이승만 대통령과 함께 당선된 부통령은 함태영(咸台永, 1873~1964) 목사였다. 최근 국내 한 일간지에 소개된 이 분들의 일화가 예사롭지 않다.

“이승만이 한성(서울)감옥에서 사형이 집행돼 하와이 및 미주에서 활동할 수 없었다면 대한민국 건국의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이승만은 1898년 정부 전복 혐의로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종신형으로 감형되고 1904년 7년 만에 석방됐다. 함재봉 아산정책연구원장은 조부 함태영이 이승만의 감형에 기여했다는 이야기를 아버지(함병춘· 1983년 아웅산 사건 때 별세)에게 들었다고 했다.” 금년 7월 21일자 조선일보가 ‘이승만 서거 50주기’ 기획 시리즈에서 상기시켜 주고 있는 것과 같이 이박사보다 두 살 위인 함태영 목사는 1895년 법관양성소 1기 졸업생으로, 한성복심법원 판사 때인 1898년 어느 날 한 젊은이가 입헌군주제 같은 위험한 주장을 하는 모습을 보았다. ‘젊은이가 큰일 나겠다’고 생각했는데 그 청년이 붙들려 왔고, 청년 이승만은 함태영의 도움으로 복심에서 감형됐다. 함태영은 일제의 한국 강제 병합 이후 공직에서 물러나 평양신학교를 나와서 서울 연동교회 목사로 재직했고, 이대통령은 정부수립 후 함태영을 심계원장(감사원장)에 임명했으며, 1952년 정·부통령 선거에서는 무소속 부통령 후보로 출마한 함태영을 공식 지지했다는 내용을 위의 기사는 소개하고 있다.

기미년 독립선언서를 기초한 육당·최남선은 《조선상식문답》에서 “대한의 한(韓)은 옛날 같은 작은 한이 아니라 지금은 커다란 한이라는 뜻을 보인 것이다. 이렇게 ‘대한’이란 것은 두 글자가 다 합해서 나라 이름이 되는 것이요, 결코 대명(明나라)이나 대영(大英) 제국과 같이 높이는 뜻으로 대자를 붙인 것이 아니며 ‘한국’이라 함은 실제 대한을 간단하게 부르는 것이다.”라고 했다. 여기에 민국(民國)을 더한 ‘대한민국’이라는 국호는 1919년 3.1운동 직후에 만들어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정했다고 한 것이 지금까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가 하면 “대한민국이라는 나라 이름은 이미 구한말부터 쓰이고 있었다.”고 밝힌 학자도 있다. 황태연 동국대 교수는 논문 ‘대한민국 국호의 기원과 의미’를 통해 ‘대한민국’의 어원을 조선 후기부터 사용됐던 ‘백성의 나라’라는 의미의 ‘민국’에서 찾았고, 당시 ‘민국’이 오늘날 공화정(共和政)의 의미가 아니라 ‘백성이 곧 나라’라는 국민국가(國民國家)라는 의미일 것이라고 보았다. 아무튼 광복 후 1948년 제헌 국회에서 이 국호를 계승해 헌법에 명시함으로써 오늘 우리가 대한민국 국민으로 서 있는 것이다.

필자는 1968년 ‘대한민국 20년’이라는 라디오 연속극의 주제가를 작사했다. 함께 KBS 작가실에서 작업하던 이 드라마의 작가가 베트남 전선으로 취재차 떠나면서 부탁해 노랫말을 지었던 것인데, 올해가 대한민국 정부 수립 67주년이고 보면, 어느덧 47년 세월이 흘렀단 말인가!

건국 대통령 이승만 박사는 1960년 4·19 학생혁명으로 대통령직에서 물러나 하와이로 망명했다가 5년 후 1965년 7월 19일 오전 0시 35분 이 섬의 한 노인 요양원에서 아흔한 살 나이로 생애를 마감했다. 꼭 50년 전의 일이다. 건국 대통령이면서도 그에 합당한 존경을 받지 못한 이승만 박사. 집권 당시 서울 남산에 세워졌던 동상이 4·19 직후 트럭에 매달려 종로 거리를 질질 끌려 다닌 광경을 직접 목도한 필자는 그의 12년 대통령 재임기간으로 해서 90년 전 생애가 흠집을 남기고 말았다는 점에서 안타까웠다. 전주 이(李)씨 양녕대군의 16세 후손인 그가 왕조(王朝)의 재건이 아닌 백성들의 나라 공화국을 건설하고자 옥고를 치르면서까지 독립운동에 헌신했고 ‘대한민국’의 기초를 놓았던 그의 생애, 그의 영욕을 조용히 돌아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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