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복(李時復) 헌납(獻納) 사징(士澄)의 뒤이며 호는 신재(愼齋)다. 어려서부터 지극한 성품이 있었고 어버이 봉양에 부지런하였다.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과 함께 산방(山房)에서 책을 읽다 소학(小學)1215)의 ‘문왕일삼조(文王日三朝)1216)’에 이르면 문득 책을 덮고 말하기를 “옛 성인(聖人)들은 하루에 오히려 세 번 아버지의 안부를 여쭈었다는데, 나는 능히 그렇게 하지 못하니 가히 아들의 도리를 다 한다 말하겠는가?”라 하고 곧 그날로 집으로 돌아가 아버지를 살펴 드렸더니 아버지가 기뻐하며 말씀하기를 “이 아이는 소학(小學)을 제대로 실천하는 아이로다”라 하였다. 급기야 성장해서는 언제나 말하기를 “사람의 자식이라면 응당 과거(科擧)시헌 준비를 한다면〔반드시 급제로〕아버지를 영화롭게 해드려야 하거늘, 과거 급제를 추구하여 급제하지 못한다면 이는 아버지를 속이는 것”이라 하고, 드디어 과거시험 공부를 그만두고 성현(聖賢)의 격언(格言)을 추려서 삼강실록(三綱實錄)을 만들어 언제나 눈 앞에 두고 익혔다. 어머니의 병환에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드리우기 세 번으로 어머니가 회생하기 하루를 하였고, 급기야 어머니가 돌아가심에 너무 슬퍼함으로 인하여 병이 되어 죽었다. 임오년 이 사실이 조정에 알려져 동몽교관(童蒙敎官)으로 추증되었다.
정수강(鄭壽岡) 정랑(正郎) 석남(碩男)의 현손이며 호는 남호(南湖)다. 태어나면서 빼어나고 특이하여 도탑게 배워 문장에 능하였다. 천성으로 효성이 지극하였는데 어린아이 때부터 일찍이 어버이의 곁은 떠나지 아니하고, 하나의 맛나는 음식을 얻어도 감히 먼저 자기 입에 넣지 않았다. 아침저녁으로 음식 드림에는 반드시 친히 음식을 하였고, 길을 가다충효(忠孝)의 정려각(旌閭閣)이 있으면 반드시 말을 내렸는데, 누군가가〔정려각만 보면 말에서 내리는 것을〕 그 번거롭게 그리한다고 나무라면 말하기를 “자연스레 느낌이 있어 그리 되는 것을 어이하는가?”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