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more
오피니언 연재·소설

[연재소설] 고깔을 쓴다

경북동부 관리자 기자 입력 2026.02.04 10:47 수정 2026.02.04 10:50

한 관 식 작가

ⓒ 경북동부신문
말똥구리(10)
쇳물 도가니는 깡그리 먹어 치웠다. 불의 정령이 지배하는 무지막지한 복종과 숭배가 원칙이라면, 도가니는 한 점 흐트러짐 없이 자신의 소임을 다하고 있었다. 열기며, 불꽃이며, 합당한 역할이며 절대 앞서거나 뒤처짐 없이 대장간의 중심은 도가니였다. 후끈후끈한 사내의 팔뚝은 깊은 고랑을 지으며 꿈틀거렸고, 모루에 안착한 쇠붙이가 곡괭이 모양을 갖추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망치질은 요란했지만 설란에게는 생소하지 않았다. 어릴 적부터 아비의 망치질을 들으며 비석 치기한 과거가 큰 몸집으로 달려들었다. 아비의 땀방울도 어제처럼 기억났다.
“처자가 찾는 농기구는 무엇이오?”
사내가 망치질을 거두지 않고 물었다. 자신의 존재를 무시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설란에게 말을 걸어온 것이다. 예기치 않는 질문에 당황했지만 당당하게 대답하고 싶었다. 뿌리를 내릴 수 있는 첫 관문이라 생각하니 배에 힘이 들어갔다. 
“지아비를 찾고 있는 여식(女息)입니다. 오직 대장장이 여편네로 한세상을 살아볼까, 이렇게 용기를 내었습니다.”
망치질이 멈춰졌다. 고개를 돌려 빤히 설란을 쳐다봤다. 그제야 설란도 사내와 마주했다. 젊어 보였다는 데서 일단 안도했다. 요란한 사내의 가슴이 한 번 요동쳤다. 
“그전부터 나를 알고 있어 적합하다고 찾아 온 것이오?”
“아닙니다. 오직 운명에 맡기고, 신령님이 나를 지켜준다면 가장 타당한 사람과 연결 해준다는 믿음으로 용기를 내었습니다.”
“총각은 맞소. 노총각이고 신분이 천한 대장장이를 거들떠보는 처자들은 이미 신라에서 찾아보기 힘들기에, 일찍이 포기한 채로 살아가는 처지요. 제대로 찾아온 것은 맞지만 내가 마음에 찰지 의문이요.”
설란은 속으로 쾌재를 외쳤다. 몇 군데 대장간을 배회하면서 물색한 결과치가 좋은 쪽으로 이어졌다는 데서, 보현산 산신령의 영험함을 굳게 신뢰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쪽이 상투를 틀었다는 것이 사실 망설인 이유입니다.”
“아, 허허. 쇠붙이를 갈고 다듬고 망치질하면서 늘어진 머리카락이 웬만히 귀찮게 하는 바람에 상투를 틀었지요. 혼례를 포기하더라도 목구멍이 포도청이기에 상투를 고집했는데 자연히 어른대접도 나쁘지 않았소.”
설란이 둘러메고 있던 괴나리봇짐을 부둥켜안고 있는 모습에서 사내는 한 발 더 용기를 내어 다가왔다. 
“대장간 뒤편에 방이 두 칸 있소. 기거하는 내방에서 찬물 한 사발에 당장 혼례를 치러도 좋고, 아니면 옆방에 기거하면서 며칠을 지켜본 뒤 결정을 내려도 좋고, 처자의 의견을 어느 쪽이든 존중하겠소.”
설란은 따른다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사내가 급히 작업을 마무리 한 뒤 앞장섰다. 
“내 이름은 논철이오. 논에서 낳았다고 붙여진 이름인데 외우긴 쉬울게요.”
두 칸 방 앞에서 설란은 멈췄다. 누가 봐도 기거하는 방과 기거하지 않는 방이 표가 났다. 논철은 기거하는 방의 문을 활짝 열어 놓았다. 메주 익히는 냄새가 밖으로 새나왔지만 설란은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가 아랫목에 자리를 잡았다. 그도 그럴 것이 심마니 상선과의 합일(合一)날짜의 간격을 메꾸고 싶었다. 논철은 쇳물 도가니처럼 덤벼들었다. 상선보다는 힘이 세고 어찌나 요란했다. -계속



저작권자 경북동부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