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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북동부신문 |
서울에 살고 있는 초등학교 동창들이 두어 달에 한 번씩 만나는 모임에 나간 적이 있다. 옛날이야기를 나누면서 어린 시절로 돌아가는 이 만남에는 고향의 정취가 물씬 풍겨나고는 한다.
영천시 창구동 금호강변 언덕 위 조양각은 어린 시절의 추억이 아름드리나무만큼이나 크게 남아 있다. 내가 다닌 조양학교는 이 누각의 이름을 따서 붙인 이름이고, 지금은 중앙초등학교로 불린다. 3학년 때 6·25동란이 나서 피란을 다녀온 후에는 널빤지가 빠져 바닥 위를 걸어 다니기가 여간 위험하지 않았다.
마치 철교 위에서 침목을 딛고 걸어 다니는 것 같았고, 가을 어느 날 나는 그만 누군가에게 떼밀려서 아래로 떨어지고 말았다. 왼쪽 팔목 뼈가 휘어지는 바람에 깁스를 하고 한 달 넘게 고생한 기억이 난다.
경북유형문화재 제144호로 지정된 이 건물은 원래 명원루(明遠樓)였다. 보현산에서 흘러내려온 남천과 북천이 영천 중심에서 합류해 대 금호강을 이루게 마련인데, 남천 절벽에 고려 공민왕 때(1363년) 부사였던 이용이 건립한 것이다.
아득한 주남평야를 거슬러 육중하게 버티고 있는 채약산까지의 먼 경치[遠景]는 속인의 감회라도 수긍이 간다.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이 명원루가 밀양 영남루, 진주 촉석루와 더불어 영남삼루(嶺南三樓)라 하고, 또는 이 밖에 안동 영호루, 울산 태화루, 양산 쌍벽루, 김천 연자루를 합쳐 영남칠루(嶺南七樓)라고도 한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영천 고을도 왜적에게 함락되자, 의분을 참지 못한 백성들이 의병을 일으켜 그해 7월 27일 영천성을 탈환했다. 그러나 바로 그날, 당대의 시인 묵객들이 사색하고 글을 지어 읊조리던 이 명원루가 불타버리고 말았다.
그로부터 40여년이 지난 1637년 영천군수 한덕급이 그 자리에 누각 열다섯 칸과 협각 세 칸을 지어 조양각(朝陽閣)이라 이름하여 그 화려했던 명원루의 숨결을 이어갔던 것이다.
다시 1742년 당대의 명필이자 군수였던 윤봉오가 조양각을 중창하여 직접 서세루(瑞世樓)란 현판을 써서 달았다. 그러나 사람들은 아직까지도 서세루보다 조양각이란 이름이 더 익숙해서 그렇게 부르고 있다.
누각의 내부에는 “청계석벽포주회”(淸溪石壁抱州回(회); 맑은 시내 돌벼랑은 고을을 안고 도는데)로 시작하는 포은 정몽주 선생의 ‘명원루에 부쳐’[題明遠樓]를 비롯해 서거정, 김종직, 이이, 박인로 선생 등 명현의 시액(詩額) 70점이 남아 있다.
그 가운데 “조양각경차”(朝陽閣敬次)라고 하는 시는 조선왕조 영조 때의 문관으로 벼슬이 대사간에 이르렀던 정하언(鄭夏彦, 1702 숙종 28년-1769 영조 45년)이 짓고 글씨를 썼다. 끝자락에 임술 수하(壬戌 首夏)라고 했으니, 아마 요즘 같은 첫여름 음력 4월에 이곳을 둘러봤던 모양이다.
포은선생운봉 주수(圃隱先生韻奉主守)
‘조양각의 포은선생 운에 차운함’
발과 깃발 고요한데 제비 처음 돌아오니
쌓인 회포 높은 데 올라 잠시 털어보네.
언덕과 들판은 푸르른데 누각이 우뚝하고
이정 길 멀고 먼데 손님이 돌아오네.
저문 날 가는 고비 멈춤을 방해 마라
낯 선 곳에서 이 술잔을 들기 쉽지 않으리.
더구나 맑은 물 난간 밑에 흐르니
구름 그림자도 함께 가자 다시 따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