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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일반

[서오칼럼]호국의 별들을 기리면서

경북동부신문 기자 입력 2015.06.11 14:26 수정 2015.06.30 14:26

ⓒ 경북동부신문
지난 2월부터 매주 토요일과 일요일 저녁 KBS-1TV가 방송하고 있는 대하사극 ‘징비록’은 지정학적으로 강대국 사이에 놓인 조선시대 우리 조상들의 아픔을 진하게 전해준다. “임진왜란, 피로 쓴 교훈”이라는 부제가 말해주듯이 '징비록'은 당시 재상을 지낸 서애 류성룡이 남긴 징비의 기록이다. 징비는 시경 소비편(小毖篇)의 '내가 지난 잘못을 미리 징계해 후환이 없도록 조심하리'(予其懲而毖候患)라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1592년 임진 음력 4월 13일(양력 5월 23일) 20만명에 가까운 군대를 파병해 조선을 침공한 일본군은 첫날 정발이 지키는 부산진성과 송상현이 버티는 동래성을 일거에 함락한 다음 불과 10일만에 경상도를 넘어뜨렸다. 침략군의 육군은 종래 일본 사절단이 조선에서 이용하던 세 군데 길을 따라 북진하고, 수군은 조선 남해와 황해를 돌아 물자를 조달하면서 육군과 합세하는 작전을 전개했다. 고니시 유키나가를 선봉으로 하는 제1군은 부산·밀양·대구·상주·문경 등을 거쳐 충주에 이르고, 제2군은 가토 기요마사가 인솔해 울산·영천 등을 거쳐 충주에서 제1군과 합세해 한양으로 진군했으며, 구로다 나가마사의 제3군은 김해를 지나 추풍령을 넘어 북진했다. 일본군이 노도처럼 북진해 오자 조선 왕실과 조정은 수도 한양을 버리고 북쪽으로 도주해 분노한 백성이 궁궐과 전적을 태워버렸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곳에서 승전보가 날아들었다. 승리의 주역은 관군도 아닌 농민 등 일반 백성들로 이뤄진 의병들이었다. 대구역에서 동촌으로 가는 길목에 홍의장군 곽재우의 동상이 서 있는데, 그가 처음 의병을 일으킨 날을 양력으로 환산해서 6월 1일을 ‘의병의 날’로 정해 해마다 이날 그분들의 호국정신을 기리고 있다. 우리 고장 영천은 일본군 제2라인이 북상한 곳으로, 여러 의병장이 나왔을 뿐만 아니라, 영천성 자체가 임진란 당시 전국 최초로 탈환한 곳이란 영예를 안고 있다. 영천시가 1983년 「조양각시문집」을 펴내면서 임진왜란 때에는 “호국의 의병들이 그 유명한 화공법(火攻法)으로 수많은 왜병들을 금호강 절벽 밑 푸른 물속에다 장사지내 겨레의 기개를 발휘했다”고 적었는가하면, 영천성이 함락되자 “의분을 참지 못한 뜻있는 인사들이 앞을 다퉈 의병으로 자진해 죽음으로써 항쟁한 결과 7월 27일 드디어 전국에서도 제일 먼저 영천성을 탈환한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또 다른 기록(디지털 영천문화대전)은 영천 신녕 출신 권응수(1546-1608) 장군의 이력을 쓴 다음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1592년 5월부터 의병 활동을 전개하여 여러 곳에서 전과를 올리고, 6월에 경상좌도 병마절도사 박진(朴晋)의 휘하에 들어갔다가, 7월에 각 고을의 의병장을 규합하여 의병대장이 되었다. 이 무렵 영천에 있던 적군은 신녕·안동에 있던 적군과 연락하면서 약탈을 일삼고 있었다. 권응수는 7월 14일에 박연(朴淵)에서 적을 공격하여 궤멸시키고, 22일에는 소계(召溪)·사천(沙川)까지 추격하여 격파하였다. 7월 25일에 군사를 동원하여 공격을 시작하고, 26일에는 결사대원 5백 명을 적진으로 돌격시켜 크게 격파하고, 다음날에는 화공(火攻)을 전개하여 영천성을 수복하였다. 이후 신녕·의흥·의성·안동의 적은 모두 한 곳에 모였고, 영천의 적은 경주로 후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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