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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일반

[서오칼럼]6.25동란과 영천전투

경북동부신문 기자 입력 2015.06.25 14:26 수정 2015.06.30 14:26

최 홍 준 방송작가

↑↑ 방송작가, 전 한국천주교평신도사도직단체협의회장
ⓒ 경북동부신문
TV 주간 연속창극 녹화를 끝내고 뒤풀이를 할 때 내 고향이 영천이라고 말하자 충청도 공주가 고향인 박동진 명창이 대뜸 “쇠전[牛市場]이 유명한 데여!”라면서 영천을 지나다닐 때 겪은 일화를 들려주곤 했다. 버스 정류장이 있던 서문통에 쇠전이 번창했던 것을 나도 기억한다고 대답하며, 송아지까지 끌고 와서 흥정하고 거래하던 당시의 광경을 떠올리기도 했다. 아닌 게 아니라 신시장이 들어선 오늘의 영천은 대구, 경주, 포항, 안동방면으로 통하는 교통의 요충지로서 5일장이 서는 2일과 7일이면 시장 안은 물론, 4차선 도로 500m 양편 인도까지 각종 노점상들로 붐빈다. 전국의 재래시장을 소개하는 한 인터넷 사이트는 영천시장을 대구 약령시장, 안동장과 함께 경상도 3대 시장으로 꼽혀왔고, 특히 모든 약초는 전국에서 가장 많이 생산 거래되고 있다고 전한다. 고추, 마늘, 양파, 포도가 특산물인 우리 고장은 앞에서 말한 ‘영천쇠전’이 유명해서 수원쇠전 다음으로 알아준다들 말한다. 교통의 요충지라는 이점으로 지금까지 그 규모와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영천장이 경북일대의 상인들이 모여드는 경상최대의 농산물 교역시장이란 점에서는 자랑스런 일이거니와 임진왜란에 이어 6?25동란 때도 혹독한 전투를 치른 악몽 같은 우리 고장의 과거사가 오늘 우리의 가슴을 저미게 한다. 최근 6?25 발발 50주년을 지내면서 갖가지 행사며, 특집 기사와 프로그램을 만날 수 있고, 반백년 세월이 참으로 무상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우선 명칭부터가 6?25동란, 6?25사변이라고 했다가 6?25남침, 6?25전쟁 등으로 바꿔 부르게 되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를 기해 북한 공산군이 북위 38도선에서 일제히 총격을 가하며 남쪽으로 쳐내려왔다. 그날은 일요일이었고, 영천에는 비가 내렸다. 영천읍에 속하기는 했으나 조교동 우리 집은 성내동 성당까지 십리 가량 떨어져 있었으므로 아버지 자전거 뒷자리에 올라앉아서 가는 길이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아홉 살이었고, 3학년에 다니던 나는 전쟁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아들을 수는 없었으나, B2-9 수송기가 하늘을 날고, 처음 듣는 말씨로 피난민들이 쉴 새 없이 찾아와 먹을 것을 청하는가하면, 미군들의 군용차가 비포장도로를 질주하고, 냇가에 차를 대어놓고 ‘와시와시’(car wash ; 세차)를 외치면서 아이들을 불러 모으거나 더러는 못된 군인들이 곡식 가마니를 쿡쿡 찌르면서 ‘색시’를 내어놓으라고 횡포를 부리던 기억을 떠올리면 전쟁의 뒤안길이 어떻다는 것쯤은 짐작이 간다. 일부 미군들의 잘못이 있었으나 대승적인 면에서 보면 전쟁발발 소식을 접한 미국은 적극적이고도 신속하게 우리나라를 도와 누란의 위기에서 구해 낸 우방이었다. 그날 6월 25일 미국은 유엔안전보장이사회를 긴급 소집해서 북한의 무력공격은 평화를 파괴하는 ‘침략행위’라고 선언하고, 북한에 대해서는 즉시 전투행위를 중지하고 그 군대를 38선으로 철군시킬 것을 요청하는 결의를 채택했다. 이틀 후 27일 미국 대통령 트루만은 미국의 해군과 공군이 한국군을 지원하도록 명령했고, 같은 날 안전보장이사회는 유엔 회원국들에게 북한의 무력공격을 격퇴하고 국제 평화와 한반도의 안전을 회복하기 위해 필요한 원조를 한국에 제공할 것을 내용으로 하는 권고문을 채택함으로써 미국의 군사조치를 추후 승인하기에 이르렀다. 미국의 군사조치는 다시 7월 7일에 안전보장이사회에서 한반도의 유엔 군사 활동을 위해 미국에 최고지휘권을 위임하는 결의를 채택함으로써 미국의 맥아더 원수가 유엔군 총사령관에 임명되고 유엔군의 파견이 결정됐으며, 한국을 원조하기 위해 육군·해군·공군 및 지상군을 파견한 16개 UN 회원국의 군대는 유엔군사령관의 지휘를 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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