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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연재·소설

[연재소설] 고깔을 쓴다

경북동부 관리자 기자 입력 2026.07.22 10:11 수정 2026.07.22 10:13

한 관 식 작가

ⓒ 경북동부신문
말똥구리(29)
범은 수시로 이산 저산을 옮겨 다녔다. 어느 곳에도 천적이 없다는 것을 입증하는 강함에 대한 선포 같았다. 만물은 하늘 아래 존속(存續)하며, 세상의 변화를 추구(追求)하려는 인간들의 노력은 어차피 무리를 지어야만 가능하게끔 범의 시야 안에서 읽혀지고 있었다. 홀로서기에 적합한 최적의 본능으로 귀소를 물고 사라진 범은 보현산 한줄기 능선을 넘어갔고, 소궁을 물고 온 범은 두마국(國) 턱받이 격인 남근(男根)바위 밑을 파고들었다. 지나다니면서 안성맞춤 보금자리라 눈여겨봤던 은밀한 장소에 큰 몸집을 비집고 들어왔다. 이건 실로 거역할 수 없는 방어의 수단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한입 입가심 밖에 되지 않는 인간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위협적이며 광폭하다는 것을 오랜 경험치(經驗値)로 터득한 촉(觸)의 경계에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개고기와 비슷한 인간 살코기의 특유한 잡내는, 범으로 하여금 오랫동안 켕기는 두려움의 무게로 안겨주곤 하였다. 그렇지만 굴복할 수 없는 이유는, 숲의 제왕을 입증하면서 만천하에 선언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단숨에 제압된 소궁의 목덜미는 이제 검붉은 핏덩이가 말라붙어 있었다. 뜨겁게 귀소와 합궁했던 어젯밤의 몸뚱어리는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게 싸늘하게 식어있었다. 알몸을 대충 가렸던 겉옷은, 오는 도중에 가시덤불에 채이고 나뭇가지에 뜯겨 훤히 드러난 속살이 되어 있었다. 
그 팽팽했던 젖가슴은 쉽사리 숨이 죽지 않은 채 버티고 있는 모습이 신기했다. 소궁의 간헐적 숨통이 남아 있는 듯 손가락 끝이 몇 번 옴짝달싹 거렸다. 범은, 남근 바위 밑이 주는 은밀함에 자신감이 솟아났는지 소궁의 허리를 통째로 물어뜯었다. 덩어리 진 핏물이 사방으로 튀었다. 바위 틈새 안에는 순식간에 인간 살코기 잡내가 이끼처럼 스며들었다. 어쩌면 귀소의 아기씨가 소궁의 몸 안에서 착상에 성공했을지 모를 안타까움이 앞섰지만, 한 끼 식사로 만족스럽지 못한 범의 입맛 다심은 모든 걸 상쇄(相殺)시키고 말았다. 
범은 몸을 일으켰다. 바위틈에서 벗어나 우렁찬 존재를 보현산 능선의 이쪽저쪽으로 배달하기 위한 포효가 연거푸 울려 퍼졌다. 또 어느 능선에서 화답하는 포효가 도착하였다. 그들은 그들의 언어로 의사소통을 하고 있었다. 약진(躍進)하는 여름의 끝은 온산을 점령하려는 단풍나무 가지 끝에서 잠시 흔들거렸다. 질식하도록 짱짱한 햇볕이 그늘을 물고 다니는 듯 순해지고 있었다. 마을이 훤히 내려 보이는 너럭바위 위에서 우뚝 선 범의 자태는, 한 계절이 저물고 한 계절이 들이 닥치는 교차점에서 더욱 빼어나게 아름다웠다. 
범은 인간들을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다. 언제일지 모르지만 촘촘한 간격으로 온산을 뒤져 자신을 찢어발겨갈지, 항상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었다. 인간이 사는 땅은 처음부터 인간의 땅이었고, 범이 사는 영역은 처음부터 범의 영역이었다면 알게 모르게 침범의 횟수를 넓힌 것이 인간일까, 범일까. 마을로 내려간 횟수보다 산에서 마주친 횟수가 상당하다면 인간들이 먼저 도전을 해온 셈이었다. 영역표시를 위해 나무에 발톱 자국을 내고, 오줌으로 냄새를 남기며, 몸을 비비는 행동을 곳곳에 남겨두었다. 그러나 인간들은 개의치하지 않고 경계를 수시로 넘나들며 범의 땅을 위협하며 마침내 몰아내기 위해 혈안이 되고 있지 않는가. 범은 다시 한 번 아까 먹은 소궁의 살코기에 입맛을 다셨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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